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토바 덴노 (문단 편집) === 치세와 인세이(원정) === 겐큐 3년(1192) 3월까지는 고시라카와 법황의 [[인세이]]가, 법황 사후에는 관백(칸파쿠)인 구조 가네자네가 조정을 좌우했고 고토바 덴노는 실권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구조 가네자네는 법황이 그토록 기피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대한 [[쇼군|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 정이대장군)직의 수여를 실현시켜 가마쿠라 막부와 강력하게 밀착했지만, 이후 요리토모의 딸 오오히메의 입궁 문제로 요리토모와의 관계가 소원해졌고, 겐큐 7년(1196) 츠치미카도 미치치카(土御門通親, 미나모토노 미치치카)의 양녀가 황자를 낳은 뒤에 일어난 모종의 정변으로 조정에서 축출되었다. 당시 그의 딸 구조 닌시(任子)도 중궁의 자리를 잃고 궁중에서 쫓겨났다. 이 정변의 배후에는 앙심을 품은 요리토모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겐큐 9년(1198) 1월 11일, 황자인 [[츠치미카도 덴노|타메히토]](爲仁)에게 양위하고 상황이 된 고토바는 [[츠치미카도 덴노]], [[준토쿠 덴노]], [[주쿄 덴노]] 등 3대 23년에 걸쳐 조큐(承久) 3년(1221)까지 인세이를 행했다. 쇼군 요리토모의 반대도 무릅쓰고 강행한 것이었다. 고토바 상황은 천황의 외척인 츠치미카도 미치치카조차 배제하며 덴조비토[* 殿上人, 전상인. 천황의 거처인 청량전에 오를 자격을 갖추었던 4, 5품 이상 6품의 당상관들이었다.]들을 정리했는데 원래 천황의 재위 중에 임명된 덴조비토는 천황의 퇴위와 함께 그대로 그 인(院, 원)의 덴조비토가 되는 것이 관례였지만, 고토바 상황은 이러한 구례에 구애받지 않았다. 고토바 상황은 인쵸(院廳, 원청) 개혁을 실시하는 등의 적극적인 정책을 채택했고,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사망(1199) 뒤에도 대두하던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에 대해 강경노선으로 나갔다. 쇼지(正治) 3년(1200)에는 <백수가>(百首歌)를 기획, 후지와라노 사다이에(藤原定家)를 작가로 선발했고, 이때부터 두 사람은 와카(화가)를 통해 빈번하게 교류하기 시작했다. 겐닌(建仁) 원년(1201) 7월 27일에는 '와카쇼'(和歌所, 화가소)를 설치해 이듬해 3월, 와카집인《신고킨와카슈》(新古今和歌集)를 편찬했다. 서문에서 고토바 상황은 >"와카는 세상을 통치하고, 백성의 마음을 온화하게 만드는 길이다." 라고 적었는데, 여기서 고토바 상황이 가진 천황에 의한 통치에 대한 열망을 엿볼 수 있다. 《신고킨와카슈》가 편찬된 이해(1202)에 구조 가네자네가 출가하고 츠치미카도 미치치카가 급사했다. 이미 고시라카와 법황이나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도 사망한 상태에서 명실상부한 '치천(治天)의 군(君)'은 바로 고토바 상황 자신이었다. 이듬해인 겐닌 3년(1203)에 이루어진 상황 주도하의 지모쿠[* 除目, 헤이안 시대 여러 관리의 임관 의식]는 그러한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백인일수]]>를 창시한 [[후지와라노 사다이에]]는 자신의 일기에서 >"지모쿠는 숫제 예려(叡慮, 임금의 심려)에 치우친 것이었다고 한다" 라고 적고 있다. 또한 공사의 재흥이나 관례의 정비에도 적극적으로 임하는 등 정신적으로도 친정에 의한 통제를 강화하려고 했다. 그 어려움은 실로 '범의 꼬리를 밟은' 것과도 같았다. 요리토모 사후, 시간이 흘러 그의 4남인 센만(千幡)이 가마쿠라 막부의 제3대 쇼군으로 옹립되자, 고토바 상황은 직접 그에게 '사네토모'(實朝)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후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에 대해 유화적인 분위기를 내비치면서 가마쿠라 막부 내부에 교토 조정의 영향력을 확대시켜 나갔는데, 막부측에서도 자식이 없는 사네토모의 후계로 고토바 상황의 황자를 맞아들여 신생 무가정권을 안정시키려는 '미야 쇼군'(宮將軍, 궁장군)의 구상을 밝혀오면서 교토 조정과 가마쿠라 막부는 잠시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사네토모의 쇼군 옹립을 계기로 고토바 상황은 적극적인 대막부 공작을 펼쳤는데, 막부의 요청으로 사네토모에게 새로운 지위를 내려주었고, 자신의 근신인 보몬 노부키요(坊門信淸)의 딸을 사네토모에게 출가시켰으며, 사네토모의 문장 스승으로 박사인 미나모토노 나카아키라(源中章)를 가마쿠라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중차대한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제3대 쇼군 사네토모가 조카인 미나모토노 구교(公曉)에게 암살당한 것이었다. 더불어 '미야 쇼군'에 대한 막부(바쿠후)의 구상도 고토바 상황의 거절로 물거품이 되었다. 조큐 원년(1219), 나이리슈고(內裏守護, 내리수호)를 맡고 있었던 미나모토노 요리모치(源賴茂)가 사이멘노 부시(西面武士, 서면무사)에게 습격당해 다이리의 인수전(仁壽殿)에서 잡혀 죽었는데, 그 원인에 대해서는 요리시게가 쇼군 지위를 노렸기 때문이라는 설, 가마쿠라 막부 토벌을 계획하던 고토바 상황의 의도를 눈치챈 요리모치가 입막음을 위해 피살된 것이라는 설 등 여러 설이 있다. 사이멘노 부시는 고토바 상황이 호쿠멘노 부시(北面武士, 북면무사)에 더해서 자신의 경호를 위해 인(院)의 서쪽에 설치한 또 하나의 무사 조직이었다. 그때의 화재로 인수전 뿐만 아니라 의양전(宜陽殿)ㆍ교서전(校書殿) 등 궐내 많은 전각이 소실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고토바 상황은 이 일로 소실된 대궐의 재건을 상경(上卿)인 미나모토노 미치토모(源通具)에게 맡겨 진행시켰고, 다이리 재건을 위한 역(役)을 쿠니(율령국)마다 매겼다. 그러나 도고쿠(東國, 동국)의 지토(地頭, 지두)들이 이를 거절하는 바람에 결국에는 서쪽 지방에서의 비용만으로 다이리는 재건되었다. 도고쿠에서 고토바 상황의 부역을 거절한 배경에 조정과 막부의 관계 악화가 있었는지, 조정이나 막부에는 도고쿠의 그들에게 강제로 무엇인가를 징수할 힘이 없었던 것인지, 아직까지도 분명하지 않다. 내리 재건이 조큐의 난 이전에 끝났는지 내란으로 중단되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 다이리 재건은 교토 조정이 주도한 마지막 공사였다는 것만 오늘날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